쥐어짜내기

우리가 7년 전에 첫 투자를 했고, 이후에 네 번을 더 투자해서 총 다섯번 투자한 회사의 창업가분들을 얼마전에 만났는데, 그날의 미팅에 대한 여운도 오래 갔고 여러가지 면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 많아서 몇 자 적어보고 싶다.

일단 이 팀은 진짜 바퀴벌레팀이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면 이분들은 진작 회사 문을 닫고 사업을 접어야 했는데,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으로 지금까지 계속 잘 버티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업을 접어도 그 누구도 이 분들을 비난할 수 없는게, 그동안 너무 열심히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강조하지만, 사업은 단순히 실력만으로 하는 게 아니고 운도 따라줘야 하는데 – 실은 운이 실력보다 더 중요하다 – 이 분들에겐 아쉽게도 운이 별로 안 따라준다는 생각을 나는 자주 한다.

나는 이분들을 정기적으로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기분좋게 놀란다. 이들이 잘 버티고 있다고 했지만, 매번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건, 단순히 버티고만 있는 게 아니라 이 어려운 환경에서 계속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매번 답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계속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은 지금까지 어려운 사업을 하는 수많은 회사와 창업가를 본 나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이분들은 볼때마다 매번 마지막 한 방울까지 스스로를 쥐어 짜내면서 방법을 찾는 게 정말 신기하다. 얼마전 미팅에서는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이 질문을 했다.
“와,,,나는 과연 나 스스로를 이렇게 쥐어 짜낼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게 못 한다. 그냥 생각만해도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일반 사람들보다 고통을 나름 잘 견디고, 힘든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방법을 찾는 노력을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이들과 같이 체력과 정신력을 쥐어 짜내면서 방법을 찾는 걸 못 하는 걸 생각해보면,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들은 정말 독특하고 특별한 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고, 이런 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감사했다.

위에서 말한 회사는 최근 1년 동안 거의 매달 회사에 큰 위기가 왔다. 자금의 압박, 정책의 변경, 경쟁사의 방해, 내부 인력과의 갈등 등과 같은, 규모가 작고 돈이 없어서 체력이 약한 스타트업을 한 방에 훅 가게 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었고, 솔직히 매번 이런 일이 일어날때마다 나는 이제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이 창업가들은 그냥 사람이 아니다. 절대로 죽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바퀴벌레 같은 분들이라서 매번 위기가 닥칠때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주말도 반납하고 전체 팀이 똘똘 뭉쳐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 힘든 일이 닥칠때마다 어쩌면 이번엔 우리 회사가 망할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을 느꼈지만, 또 방법을 찾아서 극복했고, 이렇게 극복한 후에 생각해보니 그 공포스러운 상황이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다고 느끼면서 계속 체력과 용기가 쌓이게 된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면 창업가들은 새로운 긍정의 힘과 자신감을 얻게 되고, 이는 또다시 한번 모든걸 쥐어 짜내면서 새로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용기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반복될수록 복리가 작용하면서 웬만한 어려움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창업가가 된다.

나는 모든 어려움에 대한 해답은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대부분 답을 찾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좋은 창업가들은 체력과 정신력을 쥐어 짜내면서 매번 이 해답을 찾는 걸 자주 경험하는데, 이럴때마다 우리가 정말 대단한 사람들과 이 힘든 여정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

오늘도 고통스럽고 힘든 하루가 되겠지만, 다시 한번 모든 걸 쥐어 짜내보자. 답은 어딘가에 있고,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긍정랜드

누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농담 반으로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는 금융업이 아니라 건설업(=노가다)이라고 한다. 워낙 초기에 투자하고 우리가 직접 투자사를 운영하는 건 아니지만, 창업가가 회사 만드는 걸 옆에서 같이 도와주고 있고, 바닥부터 회사 만드는 걸 묘사할 때 “building”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게 마치 건물을 올리는 것(=building)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자주 사용하는 비유는 ‘소방관’인데 워낙 많은 회사에 투자하다 보니 매일매일 어디선가 크고 작은 불이 나고, 우리는 그 현장에 가서 불을 같이 꺼야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VC가 하는 일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처럼 화려하거나 폼 나는 것과는 정말 거리가 멀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멋진 옷 입고 – 나는 아닌데, 그래도 입어야 하는 자리면 재킷은 입는다 – 공개 장소에서 마치 우리가 특정 회사를 유니콘으로 키운 듯 이야기하니까 – 참고로 내가 투자한 회사는 많은데 내가 키운 회사는 단 하나도 없다 – VC가 엄청 화려하고 멋진 직업인 줄 안다. 실상은 완전히 반대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가 잘 될 수 있게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고, 잘 안되는 회사를 – 우리는 워낙 많이 투자하니까 대부분 회사가 잘 안 된다 – 어떻게든 다시 정상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대표들과 개노가다를 같이 하는 직업이 VC이다. 나는 자신을, 투자사를 응원하는 응원단장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저기서 시작되는 크고 작은 불을 끄는 소방대장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도 정말 어려운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과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가 런웨이를 몇 달 더 연장할 수 있을지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힘차게 굴리면서 늦게까지 통화했고, 어제도 이제 사업을 그만둬야 할지 아니면 한 번만 더 푸쉬해야할지 고민하는 대표님에게 긍정의 힘을 주입하는 노력을 열심히 하면서 안타깝고 슬픈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가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창업가는 아니지만, 이런 날이 계속되면 나도 체력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가라앉는다. 아무리 잘 자고, 잘 먹고, 잘 운동해도 나도 이제 늙은 아저씨인데 왜 이런 감정의 기복이 없겠는가. 단지 겉으로는 항상 스트롱하다고 연기할 뿐이지.

그래도 매일 최선을 다해서 온전히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스타트업 생태계는 긍정과 희망으로 가득 찬 긍정랜드이기 때문이다. 이 생태계에 있는 분들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 긍정의 마인드는 안 될 일도 되게 만드는 기적 같은 힘이 있다.

일반 회사나 대기업 다니는 분들과 캐주얼하게 이야기하거나 일 때문에 미팅하면 나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자주 본다.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존 방법과 다른 방식을 누군가 제안하면 즉각적인 반응은 항상 부정적이다. 그건 이래서 안 되거나 이미 해 봤는데 안 된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그 누구도 해보자는 의견을 제시하진 않더라. 그리고 이분들과 이야기해 보면 매사에 이런 안 된다는 의견이 절대적이어서 그냥 분위기가 너무 무겁고 부정적이다.

하지만 창업가나 스타트업 관계자들과 이야기하면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내가 생각해 봐도 안 되거나 또는 불가능할 것 같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즉각적인 반응은 일단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자. 그리고 되게 만들어보자. 이런 반응이 지배적이다. 물론 그건 안 되거나 내가 해 봤는데 절대로 안 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분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의견이 소수이고 can do의 긍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부정적인 의견과 분위기가 밀린다.

힘들고 출구가 안 보일때도 많지만, 나는 이런 긍정의 힘을 믿는 분들과 같이 일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한국에는 에버랜드가 있고, 미국에는 디즈니랜드가 있고, 마이클 잭슨은 네버랜드를 만들었는데, 창업가들은 긍정랜드를 만들고 있다.

이런 긍정 마인드를 가진 분들과 교류하면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싸울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나는 스타트업은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요샌 스타트업은 감동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싸우자

전세계에서, 특히 미국과 중국에서, 사랑받고 있는 스키선수 Eileen Gu의 인터뷰를 봤는데 이 선수는 운동도 엘리트급이지만 말도 엘리트급으로 잘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습과 실전에 임하는지, 그리고 이 두가지 할 때 마음가짐에 차이가 있는지 물어보니 다음과 같은 명언을 했다.

“I train like I’ve never won, and I compete like I’ve never lost.(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싸운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했고,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기사를 읽었고, 많은 팟캐스트를 들었지만, 작년만큼 머릿속에 남는 인상적인 말이 없었는데, 아일린 구 선수의 이 말은 근래에 들었던 말 중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엘리트 스포츠리그에서 경쟁하는 업에 종사하진 않지만, 나도 이런 마인드를 가지면서 살고,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요새 자주 한다.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처럼 훈련한다는 말은 아마도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인데, 나같은 사람이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과 특정 분야에서 정점을 찍는 엘리트 선수가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건 약간 다르다. 이 선수는 이미 올릭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본인이 경쟁하는 분야에서는 최고의 실력자라는 게 증명됐고,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다. 실은 우승을 이렇게 자주 하는 선수가 1년 365일 매일,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처럼 훈련하고 연습하는 건 굉장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팅에서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이세돌 선수가 바둑에서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연습하는 게 나는 상상이 안 가는데, 이 말을 듣고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우승을 여러 번 한 대부분의 엘리트 선수는 이런 마인드로 평소에 훈련하는 것 같다.

나는 솔직히 어디서 우승해 본 경험도 없는데, 과연 나는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선수가 이번엔 꼭 우승해야지하는 간절하고 절박하고 집착하는 자세로 매사에 임하는가? 반성하고 생각할 점이 많다.

한 번도 져보지 않은 것처럼 싸운다는 말은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처럼 훈련한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이 또한 실전에서 싸울 땐 매번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인데, 단순히 열심히 하는 걸 초월한 새로운 레벨의 투지로 경기에 임한다는 의미인 것 같다. 평생 한 번도 지지 않고 매번 이기는 사람의 정신력과 자신감은 어쩔 땐 이기지만 어쩔 땐 지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전에 내가 쓴 이 글에서 돈을 벌고 흑자를 내는 것도 해 본 사람이 잘하고, 흑자를 내는 것도 습관이라고 했는데, 우승도 비슷한 것 같다. 우승을 해 본 사람만이 경험한 자신감과 우승을 해 본 사람만이 가지는 마음가짐이 있는데 한 번도 지지 않고 매번 우승한 사람의 마인드로 싸우면 이길 확률이 극적으로 올라갈 것 같다.

나는 솔직히 매번 우승은커녕, 매번 지는 상황을 더 많이 경험하는데, 과연 나는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매섭고 독하게 매사에 임하는가? 이 또한 반성하고 생각할 점이 많다.

이런 훈련 방식과 파이팅 정신을 내가 하는 일에 적용해보면 이럴 것 같다.
회사를 검토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배우고, 정말 투자하고 싶은 회사라면 단 한 번도 딜을 놓쳐본 적 없는 투자자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또는, 회사를 발굴할 때 아직 한 번도 성공한 회사에 투자하지 못한 것처럼 딜을 찾고, 투자한 이후에는 단 한 개의 투자도 실패한 적이 없는 것처럼 창업가를 믿고 밀어주는 것이다.

한 번도 우승해 본 적 없는 것처럼 훈련하고,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것처럼 싸우자. 오늘도 모두 파이팅.

교과서로 배우는 사업

최근에 복싱을 다시 시작했다.(실은, 어깨가 아파서 요샌 또 쉬고 있지만…) 오래전에 복싱 연습을 좀 하다가, 이번에 13년 만에 다시 해보는 건데 역시 이만한 physical한 운동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복싱을 계속하다 보면 땀 흘리고 기분 좋아지는 운동으로는 최고지만, 내가 나중에 길거리에서 누군가와 시비가 붙으면 정말 이 기술로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실제로 복싱이나 태권도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길거리 싸움에서는 그 화려한 움직임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박살나는 걸 직접 본 적도 있고, 유튜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왜 복싱 챔피언들이 길거리 싸움에서는 지는 걸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 같은 초보의 눈으로 봤을 때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일단 복싱은 손으로 하는 싸움이다. 상대방도 손만 사용하면 모르겠지만 현실에서의 거친 싸움은 발도 사용하고 손에 잡히는 모든 무기가 사용되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불리한 것 같다.
복싱은 링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싸움만 연습한다는 점도 불리한 것 같다. 실전은 지형지물을 정말 잘 이용해야 하고, 완전히 열린 공간 또는 링보다 훨씬 더 작은 공간에서 일어날 수 있다.
복싱 글러브도 실전 싸움에선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맨손으로 거칠게 싸워야 하는 실전과 손에 붕대 감고, 그 위에 복싱 글러브 끼고 격투하는 건 다르다.

그리고 가장 불리한 점은 바로 복싱은 정해진 룰이 있다는 점이다. 실전에서는 일단 이겨서 살아남아야 하니 룰 같은 건 신경쓰지 말자는 생각은 하겠지만, 그동안, 이 규칙을 항상 인지하고 훈련해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길거리에서 거친 싸움꾼을 만나도 복싱의 규칙을 최대한 지키면서 싸울 확률이 크다.

그래서 복싱 챔피언들이 길거리 싸움에서 지는 걸 우리가 계속 보는 것 같다. 이들은 몸도 좋고, 움직임도 현란하고, 기술도 화려하지만, 불법이 아니면 – 가끔은 불법도 통한다 – 모든 게 허락되는 현장에서는 실전 경험이 더 많은 길거리 싸움꾼에게 밀린다.

비슷한 비유인진 잘 모르겠지만, 교과서로 경영을 배우는 학자와 정책입안자가 복싱 챔피언이고 매일 실전에서 진짜 경영하는 창업가들이 길거리 싸움꾼이라는 생각을 나는 항상 한다.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건 실전이지 가만히 있는 상대방과의 연습과 학습이 아니다. 창업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20년 치 하버드 MBA 케이스 스터디를 외우고, 사업에 대한 고민과 계획을 아무리 많이 해도 진짜로 사업하지 않으면 다 소용없다.

진짜 사업은 실전이다. 규칙도 없고, 불법이 아니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이 허용된다. 심지어 남들이 모르면 불법도 허용되는 게 실전인데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는 교과서로 사업을 배우고 강의실에서 경영을 공부한 분들이 이래저래 하는 걸 너무 자주 본다. 이들은 매일 힘들게 길거리에서 싸우면서 줘 터지고 있는 창업가들에게 훈수질한다. 어떤 이들은 제품 한 번 만들어 보지도 않고, 사람 한 번 채용해 보지도 않고, 사업자 등록 한 번 해보지도 않고, 고객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해보지도 않고, 투자유치 한 번 해보지도 않고, 마치 본인들이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이 행동한다. 나는 이런 분들에게 제발 현장을 경험하고, 실전에서 싸우는 창업가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어보라고 부탁하는데 이들은 항상 교과서와 이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교과서로 배우는 사업은 사업이 아니라 학문이다. 그리고 학문은 위에서 말한 복싱같이 실전에서는 잘 사용해 먹을 수가 없다. 진짜 사업을 하는 분들, 그리고 사업을 하는 분들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분들은 textbook smart가 아니라 street smart가 필요하다.

Second Bet Club

VC 업계에는 Second Bet Club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두 번 베팅하는 의미인데,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는 걸 의미한다. 한 창업가에게 투자했고, 이 분이 재창업했을 때 다시 투자하는 VC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업인데 왜 이런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항상 궁금했지만, 최근에 우리도 두 번 베팅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단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창업하고 엑싯하거나 회사를 폐업하는데 최소 5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는데, 이후에 또 창업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이전 사업을 마무리한 후 몇 달 또는 몇 년의 고민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걸 감안하면 VC의 역사가 최소 7년 돼야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할 수 있는데, 아직 7년 이상 된 VC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 이 사이클을 못 탔기 때문이다. 물론, 창업하고 1년 만에 폐업하거나 엑싯한 창업가도 있겠지만,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분들이 재창업하면 다시 투자할만한 분인지 충분히 판단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함께 하면서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한 창업가에 다시 투자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이 분의 전 사업의 성공적인 엑싯이기 때문이다. 좋은 IPO나, 높은 가격에 인수돼서 이 회사에 투자한 VC가 돈을 벌어야지만 이 분이 하는 그다음 사업에도 투자할 수 있는 명분과 논리가 생기는데, 창업가나 투자자나 모두 잘 알듯이 성공적인 엑싯은 확률이 상당히 낮다. 특히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투자하는 대부분의 회사가 성공적으로 엑싯하긴커녕, 창업 수년 후에 문을 닫는 걸 보면, 대부분 VC의 포트폴리오에서 두 번 투자할만큼 성공적인 창업가가 잘 안 나와서 second betting을 못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VC는 망한 창업가에겐 재투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 창업가에게 두 번 베팅하는 건 흔하지 않지만, 우린 올해 이런 사례가 세 번이나 있었다. 과거에 투자했던 창업가 세 분이 모두 재창업을 했는데, 이 세 분의 새로운 스타트업에 각각 또 투자했다.

위에서 나열했던 내용과 하나씩 비교해보자.
스트롱은 이제 15년 됐다. 우리도 이렇게 나이를 먹다보니 오래전에 투자한 창업가들이 재창업하는 사례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됐다.
스트롱은 그동안 거의 300개의 회사에 투자했다. 이렇게 많이 투자하다보니, 소수의 회사는 좋은 엑싯을 했다. 이 창업가들은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하지만, 우리에겐 성공적으로 엑싯한 회사들보다, 망한 회사들이 훨씬 더 많다. 망한 회사들의 창업가들도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 이들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Saywise는 14년 전에 Tapas Media를 창업한 김창원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구직자를 위한 AI 에이전트 플랫폼인데, 솔직히 우리는 이 제품이나 시장보단 사람을 보고 두번째 베팅을 했다. 스트롱은 타파스미디어의 첫번째 투자자였는데, 그 당시에도 우리는 김창원 대표님을 보고 투자했다. 창업한지 9년 만에 타파스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면서 우리에겐 아주 좋은 엑싯이라는 훈장을 안겨줬지만, 그 9년 간의 여정은 똥밭이었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그 힘든 과정을 못 견뎠겠지만 우린 이 분이 9년 동안 어떻게 버티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했고, 투자자로서 이 분과의 교류와 커뮤니케이션을 매순간 즐겼다. 새로운 스타트업도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SUPERBAND는 한국에서 만든 습윤밴드를 미국에서 판매하는 D2C/브랜드 사업이다. 이 회사는 우리가 약 12년 전에 투자했던 Giblib의 코파운더였던 신지혜 대표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Giblib이라는 회사는 안타깝게도 잘 되지 않았지만, 신대표님은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다시 창업에 도전했고, 우리는 이분에게 다시 한번 투자했다. 망한 회사의 코파운더에게 왜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사업의 성공은 실력과 운이 결정하는데 초기 스타트업은 실력보단 운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이 분은 똑똑하고 실력도 있는데 첫번째 사업에서 운이 별로 없었다. 두번째 사업은 실패한 첫번째 사업에서 배운점을 잘 적용하면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이전 사업을 할 때 우리와의 관계와 소통이 매우 좋아서 다시 투자하는 건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돈을 두 번이나 받아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참고로 이 회사에 투자하기 전에는 우리도 몰랐던 사실인데 한국은 전세계에서 반창고, 특히 습윤 반창고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이다.

PreventiveMD는 개인화된 GLP-1과 펩타이드 치료 요법을 제공하는 미국의 원격의료 플랫폼이다. 재미있는 건 이 회사의 Brian 대표는 위에서 말한 SUPERBAND의 신지혜 대표님과 Giblib이라는 이전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Brian과 신지혜님이 공동창업한 Giblib에 12년 전에 투자했고, 이 사업은 망했지만, 두 분은 각자의 스타트업을 다시 했고 우린 이 두개의 스타트업에 다시 또 투자했다. 왜 한 번 망한 파운더에게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본다면 똑같은 대답을 해줄 수 있다. 첫번째 사업은 운이 안 따라줬지만, 두번째 사업은 더 잘할 수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겐 회사가 좋은 엑싯을 했는지 아니면 망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창업가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와의 관계와 경험이 어땠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엔 이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어가고 서로 교류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long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업을 얼마나 오래 할지 잘 모르겠지만, Second Bet Club에 이어 Third Bet Club도 나올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