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리고 싶을 때

올해는 여러 가지 거시적인 수치나 분위기를 봤을 때 작년보다는 벤처 시장이 좋아지지 않을지 나는 개인적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한다. 아직 호황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지금 창업하는 분들은 지난 3년 동안 창업했던 분들보단 덜 쪼들리면서 사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워낙 포트폴리오가 많아서 항상 잘 되는 회사보단 힘든 회사가 더 많은데, 특히나 지난 3년 동안 어둡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길을 잃은 회사가 그 어느 때보다 많았다. 며칠 전에 아주 오래된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과 정말 힘든 대화를 나눴던 미팅을 했다. 둘 다 바빠서 오후 6시에 우리 사무실 구글캠퍼스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배달시켜서, 먹으면서 working dinner를 했는데, 이날의 느낌이 내 안에 오랫동안 남아서 – 마치 트라우마처럼 – 이 상처를 떨치기 위해 글로 한 번 적어본다.

아주 오랫동안 사업을 한 회사인데 그동안 성장은 없었고, 돈은 다 까먹었고, 공동창업자를 포함한 많은 직원도 회사를 떠났다. 돈이 없다 보니 대표이사가 개인적으로 대출받아서 회사에 가수금을 너무 많이 집어넣었고, 지인들에게도 손을 내밀어 돈을 빌렸고, 부모님과 처가댁을 비롯한 가족들에게도 돈을 빌렸다. 그럼에도 회사는 단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고 이젠 세금과 4대 보험이 밀리는 상황까지 왔다. 협력업체에 지급할 비용도 밀렸고, 투자자들에게 빌린 돈도 다 까먹었다. 나는 이 창업자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조금만 더하면 잘될 거다”라는 비현실적인 희망 고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수년 동안 이 회사를 옆에서 봤던 터라 이날 나는 이분에게 여기서 그냥 접는 게 맞지 않냐고 강하게 말했다.

실은, 과거에 사업 그만하라는 내 조언을 반대하고 계속 사업을 해서 잘 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꽤 조심스럽긴 했지만, 우리 투자금 손실은 이미 확실한 이 시점에서 이 분이 너무 힘들게 사는 게 안타까웠다. 사업하면서 온갖 고생 다 했고, 온갖 정신병을 다 얻었는데, 그냥 이제 조금은 더 편안하게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여전히 내 앞에 있는 이 창업가는 아직도 조금만 더 하면 잘될 거라고 믿고 있어서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는 것 같아서, 정신 좀 차리라고 조금 세게 말했다.

그러자 이 분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실은 너무너무 불안하고, 너무너무 힘들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면서 계속 울었다. 그 순간부터 나도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내가 밥을 다 먹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거의 8시가 돼서 미팅은 끝났고, 이 분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나는 조금 전까지 우리가 이야기했던 미팅룸으로 다시 돌아와서 앉았다. 앉자마자 눈물이 찔끔 났다.

인생을 걸고 모든 것을 바친 창업가들에게 내가 뭔데 사업을 그만하라고 해서 이들을 울게 만드는 걸까? 이분들은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무엇이 이 창업가들을 이렇게 극한 상황으로 밀어붙였을까?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등,,,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난 잘 안 운다. 그런데 이 추운 날 밤만큼은 모두 다 퇴근한 썰렁한 구글캠퍼스에서 울고 싶었다. 힘들어하는 모든 창업가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들을 가끔은 몰아붙여야 하는 나를 위해서.

한국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침몰하는 일본 경제에 대한 비판을 소신 있게 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의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날”을 작년말에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한때 전 세계 최강국이었던 일본이 어떤 내, 외적 요소 때문에 침몰하고 있는지, 그리고 일본의 정치인과 기업인이 어떻게 연속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하면서 이 실수가 차곡차곡 쌓여서 일본이 선진국에서 탈락했는지에 대한 다소 주관적이지만, 나는 어느 정도 공감했던, 그런 분석이 주된 내용이다.

흥미롭게 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바짝 긴장하면서 읽었다. 왜냐하면, 일본이 갔던 이 내리막길을 한국이 그대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은 후 내 개인적인 생각을 좀 공유하자면, 한국은 일본같이 쉽게 선진국에서 탈락하진 않을 것 같다.(물론, 한국이 현재 선진국인가에 대해서는 찬반이 갈리지만). 하지만, 우리는 일본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같기도 하지만 시스템 자체가 다르고, 정치인들도 병신도 많지만, 꽤 괜찮은 사람도 있고, 가장 중요한 건, 일본인과 한국인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 물론, 한국인이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고 생각한다 – 오히려 한국의 장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또 다른 이유는 저자인 노구치씨가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했는데, 모두 다 한국을 칭찬하는 긍정적인 내용이었고, 평소의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어떻게 일본을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따라잡았으며, 일단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면 – 책이 써진 시점에는 아직 안 올랐지만, 지금은 이미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생각한다 – 왜 일본같이 쉽게 탈락하지 않을지에 대한 노구치씨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분은 한국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사건으로 1990년대 말 아시아통화 위기를 손꼽는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IMF 사건이다. 1997년도에 태국의 바트가 폭락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통화도 폭락했는데, 이때 한국의 재벌 기업이 줄지어 도산하고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우리나라는 거의 망할뻔했다. 어쩔 수 없이 IMF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그 대가로 IMF의 깐깐한 관리 체제하에 놓이게 됐다.

일본도 이때 큰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이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이 한국과는 판이했다. 노구치씨의 의견에 의하면 이때 한국은 뼈와 살을 깎는 노력으로 체질을 완전히 개선하는 동시에 탄탄한 기초체력을 만든 반면, 일본은 눈앞에 보이는 위기에만 대처하느라 선진국과는 점점 더 멀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은 IMF 관리를 계기로 경제인과 정치인뿐만 아니라 전 국민 사이에 강한 위기의식이 생겼다. IMF 관리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업은 돈을 벌어서 수익성과 생산성을 개선해야 하고, 정부와 기업은 빠른 글로벌화를 해야지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위기 극복의 열쇠는 한국인 전원의 인적 능력 향상이라는 점에도 동의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좋은 인재를 배출하는 대학교의 교육, 연구 능력과 학생 전원의 영어 실력을 갈고닦는데 한국 정부, 기업, 학교는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이 모든 것을 한국인 특유의 앞만 보고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했기 때문에 단시간 내에 글로벌화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고, 졸업하기 어렵다는 IMF의 관리에서 조기졸업 하는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이런 위기의식과 애국심 때문에 온 국민이 나라 살리기 운동의 하나로 그 유명한 금 모으기 운동까지 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한국이기에 할 수 있었고, 한국만이 할 수 있는, 개인적으로도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노구치씨는 글로벌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어에 대해서도 한국을 칭송한다. 이 분과 비슷한 세대 한국인들의 영어 실력은 정말 형편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TOEFL 점수를 보면 한국은 아시아 국가 중 10위 안인데, 이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홍콩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시험 점수가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 영어를 일상생활에서 구사하는 실력은 홍콩이 한국보다 훨씬 높다. 일본은 아시아 29개국 중 27위로 거의 꼴찌인데 일본 정부, 기업 또는 국민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그만큼 일본은 글로벌화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거나 포기했다는 게 이 분의 주장이다.

책을 다 읽고 생각해 봤는데, 실은 한때 미국보다 더 잘 살던 세계 최강국 일본과 우리가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는데 이젠 전 세계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global cultural power가 됐다. 이 작은 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차를 만들고, 가장 좋은 가전제품을 만들고, 가장 좋은 배를 만들고, 가장 좋은 핸드폰을 만들고, 가장 좋은 반도체를 만들고, 가장 좋은 화장품을 만들고, 가장 좋은 콘텐츠를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만, 이게 의미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나다.

우리는 여기서 과연 어디까지 더 올라갈 수 있을까?

많은 분이 한국은 이제 끝났고, 일본과 같이 선진국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그 반대다. 나는 한국은 이제 막 시작했고, 훨씬 더 높이 오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물론, 쉽진 않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앞에는 도전적이고 복잡한 장애물과 과제가 놓여 있고, 하나라도 잘못되면 우린 한 방에 다시 최빈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가 미래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다면, 우린 이미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했고, 그 어려움으로부터 배움을 얻는 과정을 너무 많이 겪어서, 점진적 개선에 최적화된 민족이다. 내 이전 세대가 열심히 일했듯이, 우리 세대도 열심히 일하고 있고, 우리 다음 세대도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그 누구도 한국이 일본처럼 선진국에서 탈락하는 걸 보고 싶지도 않고, 경험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정말 열심히 일해야 하고, 여기에서 더 높이 올라가고 싶다면 더욱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 글을 읽고 또 여러 가지 부정적인 댓글이 많이 달릴 건데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일하기 싫으면 하지 말아라. 그건 본인의 자유다. 대신, 주변에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욕하지 말고, 이들을 방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휴먼지능 할루시네이션

VC가 수많은 창업가 중 성공할 만한 사람을 찾아내서 투자하고, 수많은 아이디어 중 성공할 만한 사업을 찾아내서 투자하는 과정을 흔히 pattern recognition이라고 한다. 본인이 지금까지 쌓았던 경험, 그리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했던 무수히 많은 옳은 결정과 틀린 결정을 참고해서 성공하는 사업과 창업가의 패턴을 찾아서 성공과 가장 공통점이 많은 곳에 투자하고, 실패와 가장 공통점이 많은 곳은 피하는 방법이다. 이는 마치 인공지능이 수많은 데이터 포인트를 학습하고 체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패턴을 발견하고 연관 짓는 방법과 큰 개념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VC들에겐 과거의 개인적인 경험, 판단, 결정, 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이들만의 거대언어모델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나도 VC로서의 14년 동안의 경험에서 얻은 엄청나게 많은 data point가 머리와 가슴속에 나만의 거대 모델로 존재한다. 그리고 새로운 창업가나 비즈니스를 만나게 되면, 나만의 거대 모델에서 그 어떤 패턴을 찾으려고 휴먼지능을 열심히 돌려본다. 과거에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을 봤는데, 그 사업이 잘 안됐다면, 내 휴먼지능은 그냥 패스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내고, 과거에 비슷한 성향의 창업가에게 투자했는데 크게 성공했다면, 내 휴먼지능은 투자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강하게 낸다.

실은, 모든 게 이렇게 간단했으면 좋겠지만, 내 안의 데이터 포인트들이 여간 많은 게 아니다.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을 여러 개 봤고, 몇 군데 이미 투자까지 했는데, 어떤 건 되고 어떤 건 안 됐다면, 과연 여기서 내 휴먼지능은 무슨 패턴을 발견하고 어떤 조언을 나에게 해줄까?
좋은 학교 나오고 어떤 스타트업의 초기 멤버로서 이 회사가 유니콘으로 성장하는 데 막대한 기여를 한 창업가에겐 투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분과 비슷한 경험을 한 창업가들을 무수히 만났는데, 대부분 잘 안됐다면 내 휴먼지능은 어떤 판단을 내릴까? 그런데 잘 안된 창업가가 그다음 사업을 했을 땐 대박 났다면, 이런 경우라면 우리는 투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국에서 규제 때문에 절대로 할 수 없는 사업은? 물론, 이런 사업에는 투자를 안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결정이다. 하지만, 내 거대 모델 안에는 규제받는 산업에서 틈새를 잘 찾고, 이 틈새를 크게 만들었던 데이터포인트도 있는데, 그러면 투자해야 하는 것일까? 아, 그런데 휴먼지능을 조금만 더 돌려보면, 전에 이런 논리로 크게 투자했는데 대박 망한 회사들이 여러 개 있다는 데이터포인트도 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내가 얻을 수 있는 패턴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우린 매일 5개 정도의 회사를 만나는데, 대부분의 미팅을 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 수많은 데이터포인트를 기반으로 패턴을 찾으려는 휴먼지능이 과부하 되면서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참 혼란스러운 게, 인공지능이라면 데이터포인트가 더 많이 쌓일수록 결과의 정확도가 더 높아져야 하는데, 휴먼지능의 경우 – 내 휴먼 지능 – 데이터포인트가 더 많아질수록 할루시네이션의 확률 또한 높아져서 투자 결정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요새 이런 식으로 투자 결정을 한다. 비슷한 사업이고, 비슷한 창업가이고, 비슷한 산업이고,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는데, 과거에 어떤 사업은 잘됐고 어떤 사업은 잘 안됐다면, 잠시 휴먼지능은 완전히 꺼버리고 그냥 내 직감에 의존한다. 내 직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최소한 환각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니까.

기세

창업가나 투자자라면 ‘피칭’이라는 말이 너무나 익숙할 것이다. 창업가라면 투자받기 위해서 VC들을 대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사업에 관해서 설명하는 피칭을 했을 것이다. 우리도 작년에 수백 개의 피칭을 듣고 봤다. 그런데 우리 같은 VC도 투자하기 위해서는 남의 투자를 받아야 해서 우리도 펀드레이징을 하고, 꽤 많은 피칭을 한다. 우리는 작년 9월에 새로운 펀드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통계를 내보니까 이 펀드를 만들기 위해서 180명이 넘는 투자자를(=LP) 대상으로 피칭했다. 어떤 분들은 그냥 줌으로 한 번 온라인 미팅만 했지만, 어떤 해외 투자자는 10번 이상 대면 미팅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들이 스트롱에게 모두 다 돈을 준 건 아니다. 이 중 일부만 우리에게 출자했고, 대부분의 미팅을 전쟁에 임하는 태도로 열심히, 에너지 넘치게, 그리고 기세 넘치게 진행했기 때문에, 특히나 우리에게 자금을 출자한 분들과의 미팅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중 기억에 남는 미팅이 하나 있는데, 당시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펀드를 마무리해야 하는 데드라인이 몇 주 안 남았었고, 이 투자자의 돈은 꼭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실은, 이미 이 투자자에게 과거에 두 번 피칭했다 두 번 모두 거절당했기 때문에, 세 번째 시도는(=삼수) 마지막 기회였다. 절박함에 대해서 우리는 자주 이야기하는데, 당시 내 심정은 절박함 그 자체였고, 정말로 비장한 각오로 줌 피칭 미팅을 시작했다.

피칭하기 바로 전날 밤으로 상황을 리와인드 해보자. 실은 발표해야 하는 내용은 내가 14년 동안 직접 해왔던 거라서 아주 익숙했지만, 그래도 나는 전날 밤에 10번 연달아서 리허설을 했다. 약 20분 정도의 발표이니 거의 세 시간을 같은 내용을 미친 사람처럼 달달 다시 연습했던 것이다. 줌으로 파워포인트 발표를 해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화면 공유할 때 파워포인트의 포인터/펜 기능이 가끔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고, 강조해야 할 부분을 빨간펜으로 체크하면서 발표하다 보면 그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가지 않는 알려진 문제점도 있다. 나는 발표의 흐름을 끊을 수 있는 이런 문제점들을 사전에 모두 방지하기 위해서, 그 전날 10번 리허설을 상대편에는 아무도 없지만, 실제로 줌을 켜고 라이브로 연습했다. 그리고 연습하면서 파워포인트의 포인터 -> 펜 -> 줌의 화면 공유 상에서의 페이지 넘기기, 이 전환이 매끄럽게 될 수 있게 충분히 연습했다.

다시 실제 피칭하는 순간으로 패스트포워드 해보자. 전날 연습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나는 자신감이 넘쳤고, 이번에도 돈을 못 받는 건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벼랑 끝에 선 각오로 엄청나게 기세 있게 발표했다. 온라인이고 작은 노트북 화면에서 발표하는 거지만, 반대편에 보이는 약 10명의 청중의 눈을 하나씩 맞추려고 노력했고, 엄청난 기세를 이들에게 100% 전달하겠다는 각오로 거의 샤우팅 하듯이 피칭했다. 그리고 이분들에게 우리는 돈을 받았다는 해피엔딩으로 이 피칭 이야기는 끝난다.

나중에, 이 LP들에게 들었다. 화면으로만 나를 보고 들었지만, 정말로 스트롱이 돈을 꼭 받아야겠다는 독기를 품었다는 각오가 강하게 느껴졌고, 정말 그 엄청난 기세가 줌 화면을 통해서도 생생하게 온몸으로 전달됐다고.

“인생은 기세다.”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한다.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성공한 연예인들이 이 말을 하는 것을 나는 자주 들었다. 그런데 나도 좀 살아보고, 일도 좀 해보고, 투자도 좀 해보니 정말로 이 기세가 중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다. 창업도 기세, 펀드레이징도 기세, 글로벌 진출도 기세, 심지어 우리 같은 VC가 하는 벤처 투자도 기세다. 이 모든 게 안 될 이유가 백만 가지가 있는, 했다 하면 실패할 게 거의 뻔한 일들이다. 그 와중에 되게 만들어야 하고, 되게 할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이건 자신감과 기세가 없으면 매우 힘든 일이다. 우리 주변에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나는 이들이 짐승 같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본인들이 목표하는 걸 무조건 해야겠다는 의지와 이를 막는 사람들은 모두 다 짐승같이 씹어 먹어버리겠다는 기세가 보이기 때문이다.

기세는 실제로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발동을 걸고, 누가 봐도 안 될 일을 계속 시도하게 만드는 희망과 에너지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기세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의 힘든 여정을 같이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류와 같이 흐르면서 안 될 일을 되게 만드는 방향으로 기운을 흐르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피칭할 때 내 기세가 분명히 발표를 듣는 분들에게도 전달됐고, 이들의 결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믿는다.

그럼, 이 기세는 어디서 나오는 건가? 내 경험에 의하면 기세는 누구나 다 후천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자 자산이다. 기세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그럼,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나? 결국엔 수년, 수십 년 동안 반복하는 좋은 습관과 연습에서 나온다.

철면피

본인이 얼굴이 두꺼운 철면피이거나, 또는 주변에 이렇게 얼굴이 두꺼운 철면피 친구와 지인이 항상 몇 명씩 누구나 있을 것이다. 철면피는 말 그대로 얼굴이 두꺼워서 남의 비판을 신경 쓰지 않는 뻔뻔한 사람을 뜻하는데,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라는 말도 우리는 자주 사용한다. 이 말은 어떻게, 언제 쓰이냐에 따라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데, 오늘은 아주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철면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얼마 전에 미국의 슈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저당 간식 스키니딥드(SkinnyDipped)의 창업 이야기를 팟캐스트로 들었다. 초코 코팅 아몬드인데, 주로 다크초콜릿을 사용하고 코팅을 아주 얇게 해서 다른 간식보다 당과 열량이 낮은 제품인데, 모든 창업 이야기가 웬만한 TV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듯이, 이 회사의 이야기도 너무 재미있었다. 이 회사의 창업 초기에는 내가 다른 스타트업의 창업 초기에서도 항상 발견하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창업가들의 철면피와 뻔뻔스러움이다. 엄마와 딸이 창업한 회사인데 제품을 오프라인 유통업체에 입점시키기 위해서 초반에는 두 분이 별의별 짓을 다 했다. 일단 Whole Foods 입점을 위해 간식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서 매일 매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린 이야기도 있고(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대표도 실제로 이렇게 한 적이 있는데, 이건 요새도 잘 먹히는 방법이다.), 더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는 회사의 본사가 있던 시애틀의 구글 건물에 몰래 들어가서, 구내식당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쉐프를 찾았고, 스키니딥드 제품을 구글 직원들에게 간식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설득한 이야기다.

이런 두꺼운 낯짝으로 고객사, 투자사, 협력사에 쳐들어가는 건 내가 아는 매우 많은 창업가가 창업 초기에 했던할 수밖에 없었던 공통된 필수 코스인데, 실제로 사업을 하다 보면 누구나 다 이렇게 해야 하는 시점이 있다. 그리고 정말 성공하고 싶다면 모든 창업가들이 이렇게 철면피를 깔고, 일반인들은 쪽팔려서 절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을 해야 한다.

나도 오래전에 영업하면서 철면피 영업을 했었고, 뮤직쉐이크를 하면서도 여러 번 이런 경험이 있고, 스트롱을 처음 시작할 때도 그냥 여기저기 쳐들어가서 달성하고자 하는 일을 시도해 본 적이 있다. 모든 쳐들어감이 성공하진 못했고, 어떤 경우에는 철면피가 찢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정말 간절했고, 그 간절함이 당시에 이런 두꺼운 낯짝을 형성해 준 것 같다.

나도 이런 경험을 직접 해봤기 때문에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도 가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많은 분들이 “저는 그런 거 원래 못해요” ,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라는 말을 한다. 나는 “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철면피를 깔고 행동할 수 있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이분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위에서 말한 스키니딥드 창업가나 과거의 나 같은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쪽팔림을 모르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철면피였던 건 아니다. 이들도 당연히 안 만나주려고 하는 사람들의 사무실에 불쑥 쳐들어가거나, 누가 건물의 출입구를 열어주기를 하염없이 추위에서 기다리거나, 안 사겠다고 하는 잠재 고객사 대표의 새벽 출근길 자가용의 문을 기사님 대신 매일 열어주고 인사하는 짓을 너무너무 즐겁고 기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아주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고, 하기 싫은 일이지만,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다.

모든 창업가에겐 어느 정도의 철면피가 꼭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이 회사를 처음 창업하고,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대부분 투자자들이 만나고 싶지 않거나 관심 없는 사람이고, 협력업체들이 협업하고 싶지 않거나 관심 없는 사람이고, 좋은 잠재 임직원분들이 만나고 싶지 않거나 관심 없는 사람인데, 나를 만나기 싫거나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쳐들어가는 것이다. 아주 힘들고, 아주 쪽팔리고, 아주 자존심 상하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드는, 그런 행동이지만,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무리수를 둬서 일단 만나면 그 이후에 안 될 일도 되는 것을 나는 직접 경험해봤고, 여러 번 옆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 누구도 철면피를 갖고 태어나진 않았다. 꼭 필요하고, 꼭 해야 하니까 낯짝을 두껍게 만든 것이다.